배면과 표면 사이를 흐르는 색면의 강
1.
밤은 아침 뒤로 사라진 어제의 자취가 아니라, 태양에 의해 잠시 덮여진 오늘의 배면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낮의 시간 역시 빛에 의해 가려진 어둠의 표면인 셈이다. 우리는 배면과 표면 사이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잠시 이 땅에서 호흡하다가 다음 세상 너머로 사라져 간다. 윤향숙의 회화는 배면과 표면을 노래하는 색면의 강이다. 그녀는 색면의 점에 작은 호흡들을 불어 넣는다. 그것은 마치 연금술사의 눈빛처럼 열락의 세상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난류와 차가운 한류가 교차하는 접경지대에서 아직 온전한 형상을 이루지 못한 사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모든 점이 존재하는 것들의 원초적 위치라면, 그 점들은 모태적 생성점인지도 모른다. 그 배태의 시원에서 영원성은 하나의 씨앗과 같이 생명의 꿈을 기약할 수 있다. 점은 그래서 작은 생성의 기표이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성을 향해 질주하는 직선의 궤적을 그린다. 나는 그래서 윤향숙의 점들에서 무한성, 영원성의 외로운 도로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내재한 수많은 욕망의 화원을 본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그러면서도 아른거리는 아지랑이같이 비치는 모호한 겹쳐짐은 끝없는 욕망의 꽃들, 그 흔들림이다. 그 흔들림 속에 기거하는 낮과 밤은 일식과 월식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음유시인의 발길과 같다. 간혹 윤향숙의 점 작업에서 숨겨진 기표들을 마치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기호학의 변주처럼 고요하면서도 적막하게 나타나곤 한다. 그 알 수 없는 기호들에서 우리가 굳이 어떤 의미를 발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뜻 없는 마음의 깃발처럼 바람에 흔들리거나 혹은 누군가를 부르는 영혼의 손짓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에 귀 기울이며 마치 흐르는 물을 바라보듯이 가슴으로 느끼면 될 터이다. 그 안에 생성된 점들의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유롭게 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열린 시각의 터에서 윤향숙은 가끔 조명을 켜기도 한다. 그것은 밤에도 볼 수 있는 회화, 어둠 속에서도 깨어 있는 빛나는 시각적 환영이다. 마치 님프처럼 우리는 점들의 향연 속에서 색채의 욕망을 마주하고, 현실의 일탈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윤향숙의 회화는 그래서 정지된 색면의 강에 흐르는 마음의 동요이며, 일탈의 꿈이며, 욕망의 거울이다.
2.
최근 들어 윤향숙은 강렬한 색채구사에서 벗어나 파스텔 톤의 조밀한 점들을 선택하고 있다. 마치 옵티컬 회화처럼 평면적 공간을 구획하기도 하고 혹은 색면의 공간 뒤에 사과나 의자, 컵, 병과 같은 사물들을 숨겨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비쳐 보이게 하는 오버래핑(overlapping) 방식을 택하고 있다. ‘겹쳐보인다’는 것은 일종의 마음의 허상이 실상으로 부상하는 것이며 무의식의 흐름이 시각적 환영으로 표면화 되는 것일 수 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인 관계, 둘속에 하나인 관계가 윤향숙의 회화에는 잠복해 있다. 내 안에 너가 있고, 너 안에 내가 있는 이 불리분의 관계, 상생성의 문제는 의미심장하다. 모든 사물의 형상이 점에서부터 출발하듯이 그의 점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본 모습 또한 점들의 집합체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점은 기호이지만 생명의 무한성을 상징하는 것이고, 형상이지만 기호에서 출발한 언어의 기표들이다. 이렇게 보면 증식과 환원, 생성과 순환의 관계성이 어느덧 언어적 표상이 되어 원환적 궤도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의 회화는 정지된 상태의 정물인 듯이 보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끝없이 증식의 궤선을 그리고 있는 시간성의 내러티브(narratives in the time)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윤향숙의 회화가 변화되어 온 궤적들을 가장 가까이 서 지켜보아 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이 비평적 관심사이던, 큐레이터로서 직업적 본능이던 간에 내가 그의 호화 작품에서 변합없이 발견하는 미덕은 음유시인의 시어이다. 불현 듯 사유하고, 소요하고, 비워 가는 그런 태도 속에서 바위 틈새의 꽃과 같은 그런 자태, 향기를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윤향숙의 근작들은 이전의 회화 본연의 붓질이나 혼합매체적 성격에서 벗어나 아크릴 판재를 사용한 2차원적 대면성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기성매체를 활용함으로써 정물성의 의미, 일루전의 미학을 실험하고 있다.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 아크릴이라고 하는 인공적 재료(Artificial Material)는 그녀가 생각하는 ‘겹쳐짐’의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현대적 매체인 것이다. 윤향숙은 이 인공성에다 새로운 연금술적 시어들을 새겨 넣고 있다. 점, 색면, 사과, 의자, 나무, 모호한 기호들을 마치 들판에 씨 뿌리듯이 그려 넣음으로써 색면의 강에 시각적 환영의 배를 띄우고 있다. 나는 그녀 작품 앞에서, 색면에 투영된 현실의 무거운 욕망들 혹은 가벼운 사유의 깃털들, 혹은 어제 밤에 읊조리고 고독한 시어들 속에서 정신적 유영을 멈출 수 없다.
3.
윤향숙이 그리고 있는 회화는 우리 현실의 표면과 무의식의 배면 사이를 흐르는 색면의 강이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우리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것은 정지된 화상이지만, 생명의 꿈을 잉태하고 있는 존재의 자취들이다, 나는 그녀의 회화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욕망들이 샛강의 물고기처럼 춤을 추다가 깊고 푸른 정적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본다. 그녀가 부르는 정물의 찬가, 그 무한한 반복적 음률이 마침내 점의 고향을 향해 돌아가는 길이다....색면의 푸른 물결이 고요하게 흔들린다...나도 그 흔들림 속에 있다.
2008년 2월 장동광(예술학, 독립큐레이터)